남측과 달리 북측에서는 3월 1일을 국경일이나 공휴일로 지정하지는 않고 있으나 올해 96주년을 맞아 여러 단체들이 호소문을 발표하고 매체들은 논설, 사설 등을 게재했다.

1949년 남북의 전선조직을 통합해 만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는 이날 3.1운동 96주년을 맞아 '남녘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 "민족의 자주권과 나라의 평화를 수호하며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밑에 북남관계에서 대전환, 대변혁을 이룩하여 자주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기 위한 투쟁에 총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북측 조선그리스도연맹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이날 발표한 공동결의문에서 "민족의 힘을 합쳐 조국통일의 대통로를 열어나가는데 적극 이바지하자"고 강조했으며, 북측 단군민족통일협의회와 남측 3.1절민족공동행사준비위원회와 단군민족평화통일협의회도 '남북공동호소문"을 발표, "온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외세의 간섭을 끝장내고 이 땅의 평화를 수호하자"고 역설했다.

<노동신문>과 <민주조선> 등 당과 내각, 최고인민회의 기관지는 3.1운동 96주년을 주제로 빌표한 사설에서 '외세배격'과 '자주권 수호'를 주장했다.

3월1일, 조선민족의 넋과 기상이 새겨진 역사의 날

<노동신문>은 이날 별도의 개인필명의 논설에서 "3월 1일, 조선민족의 넋과 불굴의 기상이 뚜렷이 새겨진 역사의 날"이라고 기억했다.

북에서 '3.1인민봉기'라고 부르는 3.1운동에 대해서는 "우리 민족이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자주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거족적으로 싸운 반일애국항쟁"이라고 규정했다.

신문은 봉기의 발단을 평양에서 일어난 대규모적인 반일시위투쟁을 봉화로 하여 시작됐으며, 삽시간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번져갔다고 기록했다.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는 지난해 3월 1일자에서 '3.1인민봉기'가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 지금의 평양시 중구역 만수대 남쪽에 있는 언덕인 '장대재'에서 수천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한 청년학생 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10여만명의 평양시민들이 시위대열을 이루면서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이날 서울에서는 정각 오후 2시 30분 수많은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청년학생대표가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이 자주독립국가임을 선포했다고 사이트는 소개했다.
시위대열에는 청년학생들은 물론 노동자, 도시소시민, 소년·소녀, 노인·부녀자 그리고 지방에서 고종의 장례식을 보려고 온 농민들까지 참가하여 잠깐사이에 그 수가 수십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3.1운동은 발생 석달동안 조선총독부 기록으로도 무려 106만여명(북측 200여 만명)이 참가해 그해 말까지 3,200여 회의 시위와 봉기가 일어나 전민족적인 반일애국항쟁으로 확대발전했다.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가 1,678만명이었으며, 전체 인구의 6.7%가 나선 만세시위에 놀란 일제는 수많은 헌병과 경찰, 완전무장한 수비대병력과 조선주둔 일본군, 일본 본토병력을 동원해 10여 만명의 조선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19세기 후반 민족해방운동의 총화...민족적·대중적 봉기

김일성 주석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3.1운동과 관련한 자신의 추억을 기술한 바 있다.

"시위군중과 무장경찰의 격투로 불꽃을 일으키던 보통문 앞거리에서 나의 세계관은 새로운 단계에로 도약하였다.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발돋움을 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던 그 시각에 나의 유년시절은 벌써 끝났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어서 "3.1인민봉기는 나를 인민의 대오속에 세워주고 나의 망막에 우리 민족의 참다운 영상을 새겨준 첫 계기였다"며, "독립만세의 메아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나는 우리 인민의 백절불굴의 투쟁정신과 영웅성을 두고 다함없는 자부심을 느끼곤 하였다"고 쓰고 있다.

북에서 "3.1인민봉기는 19세기 후반기 민족해방운동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민족적 봉기였고 대중적 봉기"라고 정리하는 데는 이같은 평가가 바탕에 깔려있다.

3.1운동은 갑신정변과 위정척사운동, 갑오농민전쟁, 애국계몽운동, 의병투쟁을 통해 이어져 온 민족정신이 마침내 자주독립의 목소리로 분출된 것이며, 천도교, 기독교, 불교를 비롯한 종교계 인사들과 교사, 학생들의 주도하에 면밀하게 계획되고 추진되었다고 평가된다.

북에서는 이 운동을 지도한 상층인물들이 처음부터 운동의 성격을 비폭력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독립선언을 내외에 천명하는데 그쳤으며, 민중이 주도하는 대중적 투쟁으로 전환하기보다 청원운동에 그쳤던 한계에 주목했다.

3.1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데 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중에 개량주의자로 전락하거나 일제와 타협하면서 '자치'를 주장하게 된 배경이 됐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북은 남측 근대사학계의 일각에서 33인 민족대표가 3.1운동의 이념적·조직적 지도자라는 주장을 철저히 배격한다.

당시 학생운동세력은 민족대표와 별도로 운동준비단계부터 독자적으로 대중운동을 구상·추진했으며, 33인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환상을 품고 독립운동을 준비하기는 하였으나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두려워하여 서울시 종로구 태화관에서 일제에게 자수해버렸다는 것, 그리고 실제 운동의 전개과정이 비폭력 운동방침을 내세운 민족대표의 의도와는 달리 대중적, 폭력적 형태로 귀결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설득력을 가질수 없다고 강조한다.

북에서는 이같은 견해가 민족대표의 역할을 확대평가함으로써 해방 이후 남측 우익 보수세력의 입지를 강화하고 3.1운동을 '대한민국 정부'가 계승한 정통성의 역사적 근거로 취하기 위한 정치적 저의가 관련돼 있다고 보고 있다.

노·농,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

또 1970년대 이후 대두된 민족대표 역할의 제한적 긍정론에 대해서도 북은 인정하지 않고 있다.

북의 견해에 따르면, 제한적 긍정론은 △ 비폭력주의는 무장을 갖출 수 없는 당시 조건에서 적저한 대중적, 창조적 투쟁방법이었다는 '조건론' △ 윌슨의 민족자결선언과 파리강화회의에 청원한 것은 주체적, 능동적으로 외교를 활용했다는 '주체적 활용론' △적어도 3.1운동의 시작단계에서는 지도력을 발휘했다는 '제한적 지도론' 등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조건론'은 문제의 본질이 폭력과 비폭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폭력에 숨겨져 있는 타협성, 외세의존적, 반민중적 입장이라는 것이며, '주체적 활용론' 역시 외교 그 자체에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머리에 숭미 사대주의사상이 그만큼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었기때문"이라는 것이다.

'제한적 지도론'은 3.1운동이 운동 시작에서부터 33인의 의도와 구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전민족의 투쟁으로 전개됐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그와 같은 평가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북에서는 3.1운동의 민족대표들을 민족 부르조아지 상층의 이익을 대표하는 계급의 대변자로 파악하고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로 정식화, 규정하고 있다.

이들은 "3.1운동의 발단에 기여한 애국적 인물들이지만 민족운동을 주도해 나갈 수 없는 수준에서 스스로의 계급적 제한성을 보여준 상층세력의 대표자"이며, "3.1인민봉기는 부르조아 민족주의자들이 더는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 총괄적 평가이다.

다시 말하면, 3.1운동을 계기로 부르조아 민족운동시기에 존재하던 여러 갈래의 이념적 대립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되는 각계각층, 각파가 총 망라된 전 민족운동이 처음 시작되었으며, 동시에 당시 사회의 기층 대중이었던 농민과 노동자가 운동의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3.1운동의 주력인 농민과 노동자는 뚜렷한 목표로서의 반봉건투쟁을 제시하지 못하고 부르조아 민족주의 운동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이긴 했으나 이 운동을 거치면서 "민족해방운동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지도하는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시기가 열리게 됐다"고 역사적 의의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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