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전 대통령이 최근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재임시기 남북 간 비밀접촉을 공개했으며, 특히 북한 보위부와 남한 국정원의 고위급 인사의 교차 방문이 처음으로 공식 확인됐다.

이 전 대통령은 천안함 사건 이후 “2010년 6월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 고위급 인사 명의로 메시지를 보냈다. 국정원 고위급 인사와 접촉하고 싶다는 요구였다”며 “2010년 7월 국정원 고위급 인사가 방북했다”고 밝혔다.

이어 연평도 포격전 이후인 “2010년 12월 5일 북측 인사는 비밀리에 서울로 들어왔다. 대좌 1명, 상좌 1명과 통신원 2명을 대동했다”며 “북측 인사는 예정보다 하루 더 서울에 머문 후 돌아갔다”고 공개했다.

나아가 “양측은 협의 끝에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에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점과 “2011년 초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와 접촉한 북측 인사가 공개 처형됐다는 것이다”라는 점도 밝혔다.

<통일뉴스>는 2011년 7월 6일 “남북 비밀접촉, ‘천안함 합의’ 불구 결렬” 제목의 기사로 남북 정보당국 고위급 인사의 교차 비밀방문을 단독 보도한 바 있다. [관련 기사 보기]

<통일뉴스>는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 “지난해 12월 북측 류경 보위부 부부장의 극비 서울 방문에 이어 올 1월 김숙 당시 국정원 1차장의 평양 답방이 사전에 있었고, 5월 9일부터의 비밀접촉이 이어졌다”면서 “류경 부부장은 지난해 12월 남측을 방문한 뒤 올 상반기에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서울 극비방문과 연관성이 드러날 경우 파문이 예상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김숙 국가정보원(국정원) 1차장이 2010년 7월 극비 방북했고, 류경 국가안전보위부(보위부) 부부장은 12월 5일 극비 방남했다고 적시한 것과 비교하면, 김숙 1차장의 방북 시점에 차이가 있다.

취재 당시에도 김숙 1차장의 2011년 1월 방북은 2차 방북일 가능성이 높다는 전언을 들은 바 있다. 확인 차 김숙 전 1차장에게 전화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는 전화기를 꺼둔 상태다.

당시 김숙 전 차장은 6일 “국정원에서 근무한 21개월여의 기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만 말해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은 “이후 그의 처형과 관련해 “한국에 기밀을 누설했다”거나 “서울에 가서 이명박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가 실패했는데, 즉각 평양으로 돌아오지 않고 하루 더 머물러 있었고, 이에 따라 김정일 위원장이 크게 화를 냈다”는 보고가 있었다. 당시 권력 세습을 준비하고 있던 김정은 측과 군부에 의해 제거됐다는 얘기도 들려왔다“고 적었다.

류경 부부장은 당시 남쪽에서의 행적과 관련해 해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간첩죄’로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류경 부부장은 북한 핵심 권력기관인 보위부의 실세로 2002년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방북을 이끌어낸 북일 간 물밑협상을 책임진 이른바 ‘미스터 엑스(X)’로 알려져 있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2009년 11월,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의 비공식적 접촉과 통일부-통일전선부 접촉이 결렬되자 북한은 곧바로 ‘탄탄한 비선(秘線) 구축’을 제의해왔다. 나 역시 비공식적인 비선 접촉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협의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 측이 천안함 폭침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자 북측은 쌀 50만 톤의 지원을 요구했다”고 적었다.

이 전 대통령은 2011년 5월 남북 비밀접촉을 북측이 폭로한데 대해 회고록에서 “비공개 회담을 폭로하는 것은 국제관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더구나 사실과 전혀 다른 왜곡이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국가 최고지도자 당시 획득한 정보를 이용해 개인 회고록에 남북 비밀접촉을 전격 공개한 것은 더욱 충격적인 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2010년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도 불구하고 5.24조치로 발이 묶인 민간과는 달리 남북 정보기관 고위당국자들이 남북을 오가며 정상회담 가능성을 타진했다는 점에서 이중잣대 적용도 논란거리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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