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재문 선생 33주기 추모제가 22일 인천시 당하동에 위치한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열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추모객들.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재문 선생의 33주기 추모제가 22일 정오 인천시 당하동에 위치한 천주교 인천교구묘원에서 열렸다.

추모제는 유족인 따님 경실 씨 부부의 참배로 시작되어 묵상과 추모 노래, 약력 소개와 추모시 낭송 등이 이어졌으며, 추도사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결의 노래, 추모객들의 분향재배로 마무리되었다.
이날 추모제는 유가족과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을 비롯해 비전향장기수 선생들과 양심수후원회, 여정남기념사업회, 추모연대와 서울대민주동문회 등 각계 인사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 아침에 내린 늦가을 비로 촉촉히 젖은 묘원, 예년과 달리 비교적 포근한 날씨 속에 묘소로 향하는 추모객들.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선생의 따님 경실 씨 부부.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남민전 관련자인 김경중(왼쪽), 최광운 씨가 고인의 약력 보고와 추모시 <전사 1> 낭송을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故 중덕 이재문 선생 약력

1934. 7. 9 경북 의성군 옥산면 진흥리에서 부친 이만욱 님과 모친 김원남 님 사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출생
1957. 경북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영남일보사 견습기자로 입사
1960. 4.19혁명 전후 대구매일신문, 민족일보 정치부 기자. 우홍선, 김배영, 김영옥, 황금수, 진병호, 서상호 님 등과 <통일민주청년회> 활동
1964. 8.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65년 1심에서 무죄, 2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1965. 5. 25 가톨릭신문 국회출입기자 김재원 님과 결혼
1968. 경북대 안재구 교수 등과 반공개 이념써클 <정사회>, <한국풍토연구회> 등 조직
1971.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대구경북지부 운영위원 겸 대변인. 이후 10월유신 쿠테타에 맞서 투쟁.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1급 수배, 지하활동 시작
1976. 2. 29 신향식, 김병권 동지들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결성, 서기 추대
1979. 10. 4 6년여의 수배생활, 반제민족해방 반파쇼민주화투쟁 끝에 피체
1980. 12. 23 법정투쟁 끝에 대법에서 사형 확정
1981. 11. 22 고문 후유증과 수감생활에서 얻은 질환에 당국의 방치로 포승줄에 묶인 채 옥사
** 유족으로는 동지였던 부인 김재원 님과 따님 경실, 아드님 원준이 있음.

남민전 사건이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라는 비교적 긴 이름의 ‘남민전’ 사건이란 1976년 2월 비밀단체를 조직해 유신반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1979년 84명이 검거된 유신 말기 최대 공안사건이다.

당시 검찰은 ‘북한 공산집단의 대남전략에 따라 국가변란을 기도한 사건’이라고 발표했고 법원은 관련자에게 사형, 무기, 징역 15년 등 대부분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2008년 3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가 남민전 사건 관련 신청자 중 故 김남주 시인을 비롯한 29명에 대해 민주화 운동에 기여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밝혔다.

이후 3차에 걸쳐 16명이 다시 민주화 기여를 인정받았으나,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위원회 활동이 종료되면서 추가 심의도 중단되었다.


▲ 가족대표로 잔을 올리는 선생의 남민전 동지이자 큰조카.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추도사를 하는 박중기 추모연대 명예의장과 남민전 관련자인 최석진 선생,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명예회장(왼쪽부터).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이날 추모사에 나선 박중기 의장은 “이재문 동지의 희생은 무엇인가?”라고 운을 뗀 뒤, “살아있는 우리들이 그 값을 해야 하는데 부족하다. 지금 상황은 33년 전보다 더 나빠져 고인에게 부끄럽다”며 “오늘 이 자리가 동지의 희생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도록 고민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자”고 당부했다.

이어 남민전 성원이었던 최석진 선생도 “고인을 떠올리면 언제나 밝은 웃음이 생각난다. 복잡한 것을 몇 마디로 꿰뚫어보고 알맞은 방법을 찾는 슬기를 지니셨다. 이게 선생님이 우리에게 준 가르침이었다”고 회고했다.

권오헌 회장 역시 “33년이면 한 세대가 지났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민족통일이 안 된 것”이라고 상기하고, “선생은 강하고 철저했으며 민족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민족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가져갔다. 분단의 고통을 끝장내기 위해 민족해방운동에 나선 것”이라고 강조했다.

▲ 분향하는 팔순 전후의 남민전 관련자들.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남민전 관련자 정만기 선생(왼쪽)과 <정사회> 회원이었던 이현세 여정남기념사업회 현 회장이 잔을 올리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2차 송환 신청 장기수 박희성 선생(왼쪽)과 75년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 사건으로 23년 복역한 유정식 선생.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69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조작사건으로 사형 당하고 올해 5월 16일 재심 무죄 선고로 복권된 권재혁 선생의 따님 권재희 씨(오른쪽)와 같은 사건 유족 이단아 씨.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 남민전 중앙위원으로 82년 사형 당한 신향식 선생의 미망인 이계영 여사 등과 기념사진. [사진 - 통일뉴스 류경완 통신원]

“남조선해방전략당은 인민혁명당, 통일혁명당과 함께 박정희 독재시기의 ‘비합법 정당’이다. 아니 정당 추진세력이었다.
박정희는 세 당의 ‘지도부’에게 모두 사형으로 답했다.

세 당의 살아남은 사람들은 굽히지 않았다.
힘 모아 세운 게 바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다.
지도자 이재문과 신향식,
그리고 앞서 사형된 권재혁.

‘모독’ 당한 세 영혼은 지금 어디 있을까.
편히 잠들어 있을까.”
_ 2005년 11월 3일 손석춘 논설위원의 <한겨레> 칼럼 ‘영혼의 모독’ 중에서.

 

추모시 <전사 1>
- 남민전 동지 고 김남주 시인이 이재문 선생을 기리며 쓴 시

일상생활에서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름 빛내지 않았고 모양 꾸며
얼굴 내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시간엄수가 규율엄수의 초보임을 알고
일 분 일 초를 어기지 않았다
그리고 동지 위하기를 제 몸 같이 하면서도
비판과 자기비판을 철두철미했으며
결코 비판의 무기를 동지 공격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조직생활에서 그는 사생활을 희생시켰다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을 기꺼이 해냈다
큰일이건 작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먼저 질서와 체계를 세워
침착 기민하게 처리해 나갔으며
꿈속에서도 모두의 미래를 위해
투사적 검토로 전략과 전술을 걱정했다

이윽고 공격의 때는 와
진격의 나팔소리 드높아지고
그가 무장하고 일어서면
바위로 험한 산과 같았다
적을 향한 증오의 화살은
독수리의 발톱과 사자의 이빨을 닮았다
그리고 하나의 전투가 끝나면
또 다른 전투의 준비에 착수했으며
그 때마다 그는 혁명가로서 자기 자신을 잊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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