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현지시각) 제69차 유엔총회 3위원회는 한.미.일과 유럽연합(EU) 등 60개국이 공동제안한 '북한인권결의안'을 찬성 111, 반대 19, 기권 55로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등을 '인권침해'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하도록 유엔 안보리에 권고했다.

북한은 20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미국이 주도한 이번 '결의'의 강압 통과를 대조선적대시정책의 최고표현으로 준열히 단죄하며 전면 배격한다"며 '새로운 핵시험'과 '전쟁억제력 강화'를 거론했다. 23일 국방위원회 성명을 통해서는 "극악무도한 대조선'인권'광란극을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리기 위한 미증유의 초강경대응전에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한쪽은 '인권 옹호' 외피 아래 숨겨왔던 김정은 정권 타도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다른 쪽은 인권 논의 회의장 안팎에서 '핵'과 '전쟁 억제력'을 거론하며 맞섰다. 유엔을 무대로 펼쳐진 '인권'을 소재로 한 막장드라마를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2008년 이후 브레이크 없이 질주해온 '북한인권 정치화' 소동의 민낯이다.

남북 유엔 동시가입, 북-EU 인권 대화

국제사회에서 북한인권 논의가 시작된 시점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은 1991년 4월말 1주일 일정으로 국제앰네스티 대표단을 초청했다. 대표단은 평양시 재판소 법정을 참관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사회과학원 법학연구소(현 법률연구소), 사회안전부(현 인민보안부) 교화국장 등과 면담했으며, 평양시 중구역안전부(현재 중구역인민보안서) 등을 참관했다. 9월, 남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당시 북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일과의 수교는 이뤄지지 않았다. '4대국에 의한 남북 교차승인'을 주장해왔던 미국이 냉전이 끝나자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1993년 1차 핵위기가 터졌다. 1990년대 중후반은 '고난의 행군' 시기였다. 국제사회의 북한 관련 논의도 핵과 인도적 지원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고난의 행군'을 끝낸 북한은 2000년 들어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 회복, 남북 정상회담, 북미 공동코뮈니케 등을 통해 자신감을 회복한 뒤 다음해 6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유럽연합(EU)과 인권대화를 위한 예비접촉을 시작했다. 이후 2004년 9월까지 계속됐던 '북-EU 정치대화'는 EU가 유엔인권위원회(현 유엔인권이사회) '북한인권결의안' 채택에 앞장섬에 따라 파탄났다.

미 북한인권법과 유엔 북한인권결의, 국제인권규약

민간단체에서 유엔기구 차원으로 북한인권 논의가 옮겨진 시점은 2003년이다. 그해 3월 유엔인권위원회는 찬성 28, 반대 10, 기권 14로 '북한인권결의'를 채택했다. 2004년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임명됐다. 유엔인권위원회는 2006년, 기존 경제사회이사회 산하에서 유엔총회 산하 상설기구인 유엔인권이사회로 개편됐다. 이 기구에서 12년째 북한인권결의가 채택됐다.

2005년부터 유엔총회에서도 '북한인권결의'가 채택됐다.

북한이 '숙적'으로 여기는 미국도 가세해 2004년 '북한인권법'을 제정했다. 국무부 산하에 북한인권특사를 두고, 북한인권단체와 대북방송을 지원하도록 했다. 소수의 '탈북자'을 난민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다자적 틀 내에서, 평등하게' 인권문제를 논의하자고 맞서왔다.

북한은 어느 한 국가의 일방적인 '인권법'뿐 아니라, 다자 틀 내 '나라별' 결의도 배격해왔다. 미국의 북한인권법, 유엔인권이사회와 유엔총회의 '북한인권결의'에 따른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 유엔북한인권특별보고관 방북을 허용하지 않는 배경이다. 로버트 킹 미 국무부 북한인권특사가 2011년 5월 한차례 방북했는데, '인권 및 인도주의 문제 담당 특사' 자격으로 '인도주의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나라별' 결의와 '나라별' 특별보고관 제도는 국제인권체제 내에서 줄곧 논란이 돼왔다. '망신주기식 접근', '지나친 정치화', '대립적 접근에 따른 역효과' 비판이 대표적이다. 유엔식 표현으로는 '건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유엔인권위원회가 유엔인권이사회로 바뀌던 2006년에는 이 제도의 폐지가 심각하게 검토되기도 했다.

북한은 유엔인권이사회의 보편적 정례검토(UPR)이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 규약)' 등에 따른 정기 검토에는 비교적 성실하게 응하고 있다. 회원국 또는 가입국 전체가 보고서를 제출하여 평등한 조건에서 인권상황을 검토받는 시스템이다. 북한은 2009년과 2014년 2차례 UPR 보고서를 제출했다.

북한은 1981년 7월 30일 사회권 규약에 가입했다. 같은 날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 규약)'에도 가입했다가 1997년 8월 탈퇴를 선언했으나, 수용되지 않아 그 지위가 모호한 상황이다. 1990년 8월 아동권리협약, 2001년 2월 여성차별철폐협약, 2013년 7월 장애인권리협약에 가입했다.

북한은 사회권규약위원회에 1991년 11월 1차, 2003년 11월 2차 보고서를 제출했다. 여성차별철폐협약위원회에는 2005년 7월 1차보고서를 제출했다. 장애인권리협약위원회에는 1998년 6월 1차, 2004년 6월 2차, 2009년 1월 3,4차 보고서를 제출했다.

'탈북자'에서 '정치수용소-ICC 회부'로

1990년대 중후반 인도적 지원에 집중됐던 북한인권 논의 초점이 2000년대 들어서는 '탈북자 문제'로 옮겨졌다. 남측이 탈북자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시기와 일치한다. 일부 북한인권단체들이 '탈북자 난민 보호'는 캠페인을 전개하던 때다. 일부 단체들은 '대량탈북 유도를 통한 북한 붕괴'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정치범 수용소'를 쟁점화하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ICC에 회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005년 6월 부시 미 대통령이 탈북자 강철환 씨를 백악관으로 초청하는 등 '정치범 수용소' 의제화에 주력하던 이들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그들 기대만큼 부각되지는 못했다. 대북화해협력을 펼치던 노무현 정부가 브레이크 역할을 한 까닭이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북한인권의 정치화'를 막아왔던 주요 장애물이 제거됐다. 이명박 정부는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했다. 2006년을 제외하고 불참 또는 기권했던 노무현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행보를 보인 것이다.

2013년 '유엔북한인권조사위(COI)' 설치와 그 해 12월 '장성택 처형'은 북한인권문제의 정치화 추세를 가속시켰다. COI 위원장을 맡은 마이크 커비 전 호주 대법관은 존경받는 법조인답게 취임 초기 '사실에 입각한 결론'을 강조했다. 그러나, 지난 4월 방한했을 때는 "김정은의 출현이 북한의 인권상황을 개선할 것이라는 큰 기대가 있었"으나 "산산이 깨졌고", "오히려 '가상의 적수에 대한 폭력적 제거'란 측면에서는 상황이 더욱 악화했다"고 비판했다. COI 보고서에는 '장성택 처형'에 대한 그의 충격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 'ICC 회부'이고 북한인권결의안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미국은 왜?

'북한인권 정치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당사자는 미국이다. 미국은 억류 미국인 석방을 압박하기 위해 올해 유엔총회 계기에 북한인권문제를 강하게 제기했다. 지난 9월 23일(현지시각)에는 존 케리 국무장관이 직접 '북한인권 고위급회의'를 주재했다.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장(DNI)의 방북으로 두 미국인이 풀려난 후에는 미국이 'ICC 회부' 문구 삭제를 고심 중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올해 유엔총회 북한인권결의를 둘러싸고 6자회담 참가국들은 3:3으로 갈라섰다. 한.미.일은 공동제안국으로 참여했고, 중국과 러시아는 반대표를 던졌다. 북한은 한.미.일을 향해 '초강경대응'을 경고했으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며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지난 20일 밝힌대로 '나라별 결의안에 의한 망신주기(naming & shaming)식 추궁'이 역효과를 부른 것이다. 북한인권특별보고관 방북 허용, 유엔인권기구와의 기술 협조 등 북한 제안을 뿌리치고, 미국이 'ICC 회부' 문구를 고수한 속내에 대해, 중.러 견제용이라는 등 구구한 억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북한은 지난 9월 '조선인권연구협회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국제인권분야에서의 정치적 대결은 진정한 인권대화와 협력과 절대로 양립될 수 없으며 이것이 묵인된다면 나라들사이의 불신과 반목질시만 초래하게 될 것이며 언제가도 인권의 국제적 보장문제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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