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나고야에서 문익환 목사 20주기 및 방북 2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창복 통일맞이 이사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늦봄 문익환의 정신으로 내년을 기어이 제2의 6.15시대로 만듭시다.”

일본 나고야 YWCA에서 16일 오후 1시 40분에 열린 ‘평화와 통일을 위한 늦봄 문익환 목사 추모 집회’에서 통일맞이 이사장인 이창복 6.15남측위원회 상임대표의장은 광복 70주년인 내년에 ‘민족 공동 행사’를 성취하자고 호소했다.

이날 추모집회는 일본 나고야시 소재 NPO(비영리단체) 삼천리철도가 추축이 된 행사실행위원회가 ‘문익환 목사 서거 20주기 및 4.2남북공동성명 25주년 기념 행사’로 주최했으며, 통일맞이 관계자와 문익환 목사의 가족 등 한국대표단 10명과 재일동포, 일본인 등 6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창복 이사장은 “이제 더 이상 박근혜 정부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며 “우리 스스로 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선언하고 “내년은 바로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 한일협정 50주년, 6.15공동선언발표 15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라며 “남과 북 그리고 해외가 함께 힘을 모아 반드시 ‘민족 공동 행사’를 성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우리에게 주고 간 소중한 교훈은 바로 ‘벽을 문이라고 생각하고 지르고 나아가라’는 것”이라며 ‘문익환 정신’으로 내년을 ‘제2의 6.15시대’로 만들자고 호소했다.

이창복 이사장은 “일본의 재무장을 반대하고, 한.미.일 군사동맹을 저지하기 위한 남한 사회의 움직임이 일본 시민사회에게 전달되고,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일본들과의 연대가 실현되려면 남한의 진보세력과 일본 동포들이 굳게 결속하는 것이 우선적이며, 필수적인 과제”라고 제시했다.

▲ 도상태 삼천리철도 이사장이 주최측을 대표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도상태 삼천리철도 이사장은 문익환 목사 방북 당시 유원호 선생과 합영기업을 운영했던 탓에 고초를 겪었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89년 문익환 목사님 일행 세 분이 북한을 건너간 일은 우리 가족들에게도 아주 뜻깊은, 의미있는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관련 상자기사 참조)

도상태 이사장은 “25년이 지났지만 문익환 목사님이 갖고 계셨던 사상, 그리고 그 사상을 바탕으로 한 실천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한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며 “문익환 목사 20주기를 맞이하여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못한 미완의 통일문제에 이 모임이 큰 의지가 되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전했다.

문익환 목사 방북과 4.2공동성명

1989년 3월 25일 당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상임고문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정부의 허가없이 방북해 4월 3일까지 북한에 머물며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만났다.

문익환 목사는 당시 통일민주당 당원이었던 유원호 씨와 재일교포 정경모 씨와 함께 개인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으며,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인 허담과 회담을 갖고 4월 2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항’이란 제목의 합의성명, 이른바 ‘4.2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2공동성명’의 주요내용은 ①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원칙에 기초한 통일문제 해결, ②정치.군사회담 추진과 다방면에 걸친 교류와 접촉 실현 ③연방제 방식의 통일, ④팀스피릿 훈련 반대 등이었다.

특히 연방제 방식의 통일은 “그 구체적인 실현방도로서는 단꺼번에 할 수도 있고 점차적으로 할 수도 있다는 점에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고 명기해 추후 6.15공동선언 2항의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합의의 기초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문익환 목사는 일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귀환 즉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잠입죄’로 구속됐으며, 지령수수, 잠입.탈출 혐의가 인정돼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3년 3월 6일 사면됐다.

(네이버 두산백과사전 참조, 통일뉴스 재정리)


이승환 통일맞이 운영위원장은 문익환 목사와의 인연을 소개한 뒤 “목사님은 ‘통일은 곧 민주’이고 ‘민주는 민(民) 주도’이므로 ‘통일 역시 민 주도’라고 선언했다”며 “이 ‘민 주도 통일사상’이 오늘날 한국 통일운동의 중심사상이라는 것은 이제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목사님은 광복 50년인 1995년을 앞두고 우리 결코 분단 50년을 넘기지 말고 통일하자고 하셨다”며 “통일맞이를 비롯하여 남의 모든 평화운동세력들은 내년 광복 70주년, 6.15공동선언 발표 15주년을 맞아 동아시아 평화와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 추모집회에는 재일동포와 일본인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나아가 “6.15공동선언 15주년 남북공동기념행사의 성사는 물론이요, 한반도 평화체제의 형성과 일본의 전쟁국가화 반대를 공동의 과제로 하는 지구적 연대의 대열을 더욱 강력히 확대해나가겠다”고 다짐하고 “광복과 분단 70년을 새로운 통일운동의 부흥기, 민이 부활하는 새 역사가 시작되는 전환의 해로 만들어나가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동포”라고 자신을 소개한 강춘근 삼천리철도 부이사장은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내가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이 정말 싫었고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많이 고민했다”며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통해 전신전력으로 모든 것을 바치는 분들을 만나면서 그동안 생각해온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강춘근 부이사장은 “목사님은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통일의 대문을 힘차게 열어제치려는 열망으로 평양으로 향하는 대 용단을 내렸다”며 “어떤 난관이 있던 어떤 힘든 일이 있던 어떤 슬픔이 있던 저희 민족은 반드시 통일 해야만 한다”고 격정적으로 연설했다.

▲ 강종헌 삼천리철도 고문과 문성근 '국민의 명령' 상임위원장이 장문의 추도 연설을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강종헌 삼천리철도 고문은 문익환 목사와의 감옥에서의 만남으로 시작된 인연을 소개하고 “4.2공동성명이 중요한 것은 두 가지”라며 △정치군사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의 교류를 북측이 수용한 것과 △단계적인 연방제를 처음 공식화 한 점을 꼽았다.

또한 “89년 4.2공동선언이 그 후에 통일문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며 “물론 2000년 6.15선언에도 이어졌지만, 그 중간에 두 가지 성과물이 보고 있다”고 말하고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와 1993년 북한의 ‘조국통일 10대 강령’을 들었다.

강종헌 고문은 “89년 4월 남쪽 재야를 대표해 가신 문익환 목사님과 북의 최고지도자 간에 이루어진 대화와 공감이 그 후에 통일운동 역사에서도 엄청난 자산으로 작용했다고 확신하고 있다”며 “목사님의 아호처럼 더디 오는 봄, 통일의 늦봄은 그러나 반드시 올 것이다. 함께 통일의 문을 열어나가자”고 당부했다.

문익환 목사의 셋째 아들인 문성근 ‘국민의 명령’ 상임위원장은 “한반도 정세가 총체적인 난국”이라며 “2014년 한국 현실에서 89년 방북했던 문익환 목사님이 새삼 그리워지는 이유”라고 운을 뗐다.

문성근 위원장은 “내년에 시민 100만, 200만이 모일 수 있는 온라인 광장을 만들려 한다”며 “이 안에서 민원, 청원, 캠페인을 벌이고 시민과 정당이 함께 정책을 생산하고 시민을 조직화할 것”이라고 구상이 일단을 밝혔다. 아울러 “재외동포들도 조직화 할 수 있을 것이고, 정당과 함께 재외동포 정책을 집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성근 위원장은 “지금 상황은 문익환 목사님이 방북하던 때보다 어둡지 않다”며 “온라인에 광장을 만들어서 시민을 조직하고 정당을 견인해서 정권교체를 이루고 남북평화와 통일을 이루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고 말했다.

▲ 통일맞이와 가족들로 구성된 남측 대표단이 인사하고 있다. 이혁희 통일맞이 사무처장이 발언하고 있는 모습.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한기덕 삼천리철도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모집회는 통일맞이와 통일뉴스, ‘6.15공동선언실천 일본지역위원회’가 후원했으며, 문익환 목사의 맏딸 문영금 씨가 가족을 대표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앞서, 전날 나고야 시내 한 음식점에서 진행된 환영만찬에서 콘도 쇼이치 일본 민주당 의원은 “한반도 통일과 평화를 만드는데 일본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반도 평화를 기원한다”고 인사했다.

▲ 도상태 삼천리철도 이사장과 15일 나고야호텔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 기자]
□ 통일뉴스 : 삼천리철도가 ‘문익환 목사 서거 20주기 4.2남북공동성명 25주년 기념’ 행사를 나고야에서 개최하게 된 이유와 배경을 설명해달라.

■ 도상태 이사장 : 아주 묘한 인연이 문 목사님과 있다. 특이한 인연이라고 할까. 목사님이 서거하셨을 때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추모행사가 있었다. 그때 도쿄 행사에는 참석했는데 나고야에서는 한 번도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20주기라는 의의있는 기회에 행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맡았다.

□ 요청은 어디서 온 것인가?

■ 통일맞이에서 도쿄 정경모 선생 쪽으로 먼저 제안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못하시겠다는 답을 받고 통일맞이의 요청이 간접적으로 삼천리철도 이사장에게 왔다.

□ ‘문 목사님과의 특이한 인연’을 언급했는데, 어떤 것인지 소개해달라.

■ 작년은 김대중 대통령 납치 40년 된 해였고, 올해는 문 목사님 서거 20주년인데, 내가 문 목사님과 인연이 맺어진 것이 김대중 대통령 납치 사건이었다.

한국민주화운동에 대한 관심도 평소에 많았고, 그 운동에 관여하면서 박병채라는 나고야에 계신 분과 알게 됐는데, 그분이 유원호 선생을 소개해줬다.

유원호 선생과 합영사업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 합영회사를 1988년에 설립했다. 88년 10월 아니면 11월에 내가 일본돈 1.500만엔을 합영회사에 투자했다.

그런데 1989년 3월 문 목사와 정경모, 유원호 씨가 일본을 경유해 평양에 갔다. 방북할 때 목돈이 필요했을 텐데, 그 돈 일부를 합영회사에서 끌어쓰지 않았나 하는 것이 한국 정보계통 또는 검찰의 시나리오다.

유원호 씨는 한마디도 안 하지만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웃음)

□ 도 이사장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라고 보나?

■ 그렇다. 문 목사님이 돈 많이 가진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유원호 씨도 돈이 없고, 정경모 씨도 돈이 어디 있나?

그래서 4월 일본에 돌아와서 그 때 처음으로 도쿄 긴자 도브호텔에 유원호 씨를 만나러 갔다. 그 숙소는 사회당 당수 도이 다카쿠씨가 소개해준 호텔이다.

거기 가서 유원호 씨와 만나고 정경모 씨하고 만났다. 그런데 “나도 문익환 목사님한테 인사하고 싶다” 했는데, 정경모 씨가 막았다. “만나면 안된다”고. 그 이유를 아직 모르겠다.

□ 만나면 피해가 갈까봐 그랬던 것 아닌가?

■ 유원호 씨 만나 이야기하고 정경모 씨 만나 이야기했는데 어떤 피해가 있겠나.

문 목사님이 5년 후에 돌아가셨던 1994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을 맛본 해였다.

□ 어떤 의미에서인가?

■ 내가 만든 회사에서 내부갈등이 있어서 경영자 자리에서 쫒겨났다. 그 이유도 아마 합영회사에 승산이 없는 투자를 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 그 이후에라도 문 목사님을 뵌 적이 있었나?

■ 당시 내 자식 셋이 공부하고 있어서 우이동에 집이 있었지만 내가 서울에 못 들어갔다.

문 목사님 돌아가신 뒤 95,96년경 감옥에서 나온 유원호 씨 소개로 수유리 박용길 여사 계신 곳은 서너 번 찾아간 적이 있다.

□ 문 목사님 방북 후폭풍은 없었나?

■ 자식들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가야했다. 도쿄 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을 소개받고 만났다. 그랬더니 “한국에 가도 좋다. 우이동 너희 집에서 이야기만 듣는다”고 해서 그걸 믿어서 서울에 갔다.

□ 언제쯤이었나?

■ 방북 3,4년 후에, 목사님 감옥에 계실 때 서울에 갔다. 바로 비행장에서 “이리 오라”, 바로 호텔로 갔다. 거기서 2박3일 조사 받았다. 기본 코스였다.(웃음)

□ 고문을 받지는 않았나.

■ 그건 안 했다.

□ 주로 어떤 혐의에 대해 조사 받았나.

■ 나도 많이 긴장하고 있었는데, 주로 어떤 관계가 있느냐? 돈 이야기도 나왔다. 나는 피해자였고, 그들도 다 알고 있었다. 법적으로 투자한 거다.

그전에 우리 아이들이 있는 우이동 집에 가택수색도 나왔다.

□ 문 목사님과의 인연은 주로 유원호 씨와의 연관성 같은데.

■ 내가 ‘김대중 납치사건’ 때 화가 나서 도쿄에 있는 한민통(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사무실을 찾아갔다. 한민통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초대의장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도저히 못 참겠다고 생각해 구출운동을 하러 갔다.

당시 32살 때인가의 일이고, 찾아가서 소개받은 사람이 박병채 씨다. 박병채 씨와 정경모 씨가 아주 절친한 사이다.

나고야 사람으로서 일 이야기도 많지만 박병채 씨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이 유원호 씨다. 유원호 씨가 민주화 운동하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해 정치인들의 서예작품을 구입해준 적도 있다.

□ 실례가 될 수 있지만 기자로서 묻겠다. 유원호 씨로부터 합영투자를 제안받고 투자할 때 혹시 그 돈이 정치자금이나 다른 곳으로 쓰일 수 있다는 생각은 못 해봤나?

■ 아니다. 일본돈 1,500만엔 보냈고, 그 후에 우리 회사에서 만드는 기계도 서울 회사로 보냈다.

유원호 씨 남동생 유원철 씨가 가드레일 회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회사가 실제로 운영이 되고 있었다. 유원호 씨가 들어간 후에도 유원철 씨와의 거래는 계속됐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측이 큰 거짓말을 하나 했다. 한국 쪽이 51% 자본금을 법적으로는 출자했지만 사실은 우리 돈 1,500만엔과 1,500만엔 이상 되는 우리가 보낸 기계가 전부였다. 한마디로 한국 쪽은 페이퍼 컴퍼니였다.

그래도 인생은 또 재미있다. 그 후에 유원호 씨의 동생 유원철 씨가 성실하게 같이 가드레일 일을 해서 우리 회사가 투자한 만큼 이득을 봤다.

□ 결과적으로 봤을 때, 유원호 씨가 돈을 쓰기는 썼을 것 같다. 어쨌든 한국 정부가 문제 삼지 않았나?

■ 나는 피해자라고 다 알고 있었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정치에 뜻이 있거나 정치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도 나한테 정치적 인연이 맺어져 문익환 목사님 방북도 본의 아니게 관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회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사귀다 보니까 강종헌 씨도 만나고 오사카 민족학교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게 됐다. 오사카 국제학원이다. 돈이 없어서 학교 못 나가는 아이들 보고 또 돈을 냈다. 회사에서 또 반기 드는 사람들 있을 것이다.

□ 유원호 씨와는 교류하고 있나?

■ 최근에 유원호 씨와 자주 만나지는 않고, 동생을 통해 전화로 안부를 묻는 정도다. 몸도 그리 성치 않으신 것 같고 귀도 잘 안 들린다고 하니까 일부러 만날 것도 없다.

다만 나는 유원호 씨와의 만남은 후회하지 않고 그분이 목사님 방북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어떻게 보면 그 분이 자기 인생 건 거니까 그건 높이 평가하고 있다.

94년에 문 목사님 돌아가셨고, 나는 회사에서 굉장히 궁지에 몰리고, 95년에는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굉장히 인생의 기로에 섰다. 73년 김대중 납치사건, 94년 문 목사님 서거, 10년, 20년 단위로 나한테도 큰 변화가 있었다.

□ 어떻게 그런 어려움을 극복했나?

■ 어려울 때는 물론 최선을 다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맡길 수밖에 없을 때가 있고, 세월이 해결해 준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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