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안 / NGO활동가, 재일동포 2세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일동포 2세, 배안 NGO활동가가 9월 26일부터 10월 6일까지 북한에 다녀왔다. 배안 활동가로서는 33년 만에 다시 찾는 평양행이었다. 아울러 원산도 둘러보았다. 평양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리고 북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왔을까? 강산도 세 번 이상 바뀐 33년만의 방북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평양엔 왜 가려고 하냐?”

▲ 내가 평양에 가려 하자 일본인들이 “뭣 하러 가느냐?”고 물었다. 사진은 평양의 마지막날 밤에 만난 친구들. 왼쪽 아래가 필자. [사진 제공-배안]

“왜 거기로 가야 되나?”
“뭣 하러 가느냐?”
“꼭 가야 하는 거니?”
“가서 못 돌아 오면 어쩌려고.”

내가 평양으로 가겠다 하니 주변 일본인들의 입에선 이런 말들이 튀어 나왔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러시아로 한국으로 또 다른 나라들에 떠날 적엔 부럽다 나도 가고 싶다 잘 다녀오라 한 말들이 돌아왔지만 북으로 가겠다는 나를, 사람들은 험한 밀림 속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눈치로 자꾸 쳐다 보았다. 그들의 눈엔 내가 어디 탐험으로 떠나는 것처럼 비쳤을 것이다.

북에 대한 화제가 오를 적마다 사람들은 좀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좋은 인상이 없지만 정확한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라서 뭐라 할 수 없다는 듯. 무슨 말이 나왔다 한들 “북에 대해선 인상이 안 좋다”거나, 매스컴 통해서 알게 된 화제를 꺼내는 게 일쑤다. 그런 말이 오를 적마다 나는 “어느 나라든 좋고 안 좋고가 있고 어디서든 사람 사는 곳은 크게 다르지 않다”며 떨쳐 버렸었다.

그러나 사실은 나도 궁금했었다. 매일과 같이 전해지는 북의 뉴스는 탈북자들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는 북의 참담한 모습이며 핵 개발, 미사일 실험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그곳 주민들이 어려워한다는 얘기며, 나아가서는 국가 붕괴가 멀지 않다는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실지 북을 다녀온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게 알려지는 것과는 많이 다르긴 했지만 내 눈으로 보지 못한 일들을 직접 본 것처럼 내 입에서 나가게 하기가 두려웠다.

내 눈으로 봐야 한다. 너무도 오래 가보지 못해 그곳에 사는 친척들, 친구들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북으로 가려는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일본에 있기가 답답했다

▲ 일본에 있기가 답답했다. [사진 제공-배안]

답답했다. 일본에 있기가.

해방 전후 가리지 않고 일본에서 재일동포들의 삶이 한때라도 쉬웠던 일은 없었다. 동포들이 일본의 생활에 익숙하게 되었고 세대가 바뀌어 돈이나 좀 벌게 되어 경제적 사정이 그나마 좋아지긴 하였지만 지금도 우리가 일본의 주민으로서의 권리를 가졌다 하기에는 너무도 허술한 상황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정부가 출입국관법과 국적법을 개정시켜 그 뒤로부터 재일외국인들을 둘러싸고 적지 않게 법적, 제도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민연금, 국민건강보험으로의 가입, 아동수당의 수급, 공공주택으로의 입주 등 일본국적 소유자가 아니다는 이유로 각종 제도에서 배제돼온 재일동포들이 제도 대상자가 되기 시작했고 아주 작은 금액이긴 하였으나 지방자치체에서 조선학교에 대한 조성금이 지급되기 시작하기도 했다.

일본정부가 해방 전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주권을 박탈하고 징용, 징병의 이름 밑에 강제로 우리 동포들을 끌고 오거나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고향을 떠나야만 하게 만들었던데 대한 사죄나 반성이 있어서 변화들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언뜻 보기에는 일본정부가 재일동포들에게 혜택을 준 것처럼 보였지만 여기엔 다른 나라에서는 보이지 않은 일본의 꾀임수가 존재하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종결 후 일본영해나 그 주변에 자주 나타나게 된 보트 피플들을 처음에 일본정부는 난민으로서 상륙시키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아시아지역에서 유일한 선진국이 무슨 꼴이냐며 UN을 비롯한 선진국들에서 크게 시비가 붙어 할 수 없어 “출입국 관리령”을 “출입국 관리 및 난민인정법”으로 개정시켜 겨우 1981년부터 난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재일동포들에게 아주 작은 권리가 이때 주어진 이유는 일본정부에 의하여 난민들에게 주어지려는 혜택이 재일동포들의 새털만치도 안 되는 권리보다 더 무거웠기 때문이다.

재일동포들이 살아온 길 그 자체가 오랜 투쟁의 길이었다.
일본정부는 미군의 지시 하에 6.25직전인 1949년엔 재일조선인 단체를 강제 해산시켰고 해방 직후 일본 방방곡곡에서 죽순자라듯 시작된 조선학교에 일본 경찰대가 쳐들어가 이것 역시 1949년에 강제 폐쇄시키기까지 했다. 당연히 재일동포들이 가만있지는 않았다. 재일동포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민족교육을 사수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 속에서 16살 소년이 경찰대 총을 맞아 숨지기까지 했다.

이미 일본주민이 되어 많은 시간이 지난 재일동포들에게 마치도 제집 개 목에 목걸이 달아놓은 것과 같은 제도인 외국인등록증 상시휴대제도에서 우리 동포들이 벗어나게 된 것은 해방 후 70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 와서이다.

그래서 북으로 떠나기로 했다

▲ 그래서 평양으로 떠나기로 했다. [사진 제공-배안]

더군다나 지난 몇 년 동안에는 “재일 코리안들의 특권을 허용하지 않은 시민들의 회(이하 재특회)”란 극우 단체가 우리 동포들이나 재일외국인들이 사는 동네에 수시로 나타나 “조선인 나가라” “너희들이 뭐가 잘났다고 특권을 행사하냐?” “재일조선인들은 강도질, 도적질하는 나쁜 놈들이다”하고 고함을 꽥꽥 치르며 다니게 되었다.

그뿐이랴, 고음 마이크를 설치해놓은 외선차가 시청, 현청 주변을 하루 수십 번을 돌면서 조선학교 아이들에게 지불하는 교육조성금 수급을 그만두라며 난리쳤었다.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2010년 마이크로폰을 든 “재특회”를 자칭하는 웬 남자들이 교토시내의 조선학교로 몰아가 교문 앞에서 “조선으로 돌아가라!” , “간첩의 아이들!”, “조선학교를 일본에서 쫓아내라!”, “조선학교는 학교법에 따라 설치된 학교가 아니다. 불법학교는 당장 여기서 물러가라”, “조선인 아이들 우리를 원망하지 말고 너희들이 조선인으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라”는 등 고함지르며 크게 난동을 부린 것이다.

이 지저분하고 비겁한 자들이 우리 민족의 미래이며 희망인 보물 같은 어린 것들의 마음에 상처 주고 아프게 하는 모습에 우리 모두의 마음도 찢겨져 벼렸다.

지방자치제에서 지불돼 왔던 조선학교에로의 교육 조성금도 무슨 연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만 북에 의한 납치, 핵개발, 미사일실험이란 구실 때문에 잘라져 버렸다.

이런 일들은 짙은 먹구름이 되어 재일동포들의 삶에 제대로 덮쳐졌다.
일본의 많은 친구들, 지지자들과 손을 잡아 재일동포들에 대하여 배우는 강연회, 조(한)일간의 근현대사를 배우는 모임, 60만번의 트라이 프리 이벤트, 조선학교에로의 필드 워크, 연간 수십 번에 이루는 행사를 치르면서 아픔보다 편안함, 미움보다 사랑, 차별보다 평등, 갈등보다 연대의 정을 나누며 느낄 수 있는 마당을 만들며 경험해 왔다.

하긴 20년을 넘는 동안 우리 동포들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일본인들, 재일외국인들과 함께 시민운동을 펼쳐온 나로 하여금 내 마음 한 구석 깊이에 자리잡은 답답함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일본이 썩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내 마음은 자꾸 옹색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북으로 떠나기로 했다.

떨어져 있지만 같은 하늘, 바다를 이고 사는 우리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내가 누구이고 내가 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냐, 내가 뭘 하려고 하는가,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평양교예극장, 모란봉극장을 찾다

▲ 평양 모란봉극장. [사진 제공-배안]

평양에 머무는 동안 다닌 곳은 별로 많지가 않았다. 가족, 친척, 친구들 만나기가 바빴고 어디로 멀리 떠나지 않아도 여기 사는 사람들의 삶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교예극장에서 본 교예는 어릴 적 봤던 볼쇼이 서커스만 하지는 않았지만 평양냄새가 풀풀 나는 즐거운 시간과 공간을 우리 모두에게 제공해주었다.

▲ 모란봉극장 앞에서 여자 아이들이 예쁘게 포즈까지 잡아 노래를 들려 준다.[사진 제공-배안]

모란봉극장을 찾았을 때는 국립평양교향악단 연주회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극장 앞에서 우리처럼 연주를 들으러 온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을 보고 노래하라 하니 예쁘게 포즈까지 잡아 노래를 들려 준다.

당연히 교향악단 연주도 훌륭한 것이었다. 클래식 음악만을 들리다간 손님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눈치인지 사람들이 평소 즐기는 음악 메들리를 들려준 것을 보니 여기서도 세상의 교항악단들과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구나 엿볼 수 있다.

우리 식대로 살자는 슬로건이 걸쳐진 지 벌써20년 이상은 지났으리라 기억되지만 근대화, 현대화되어 나가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도 이는 분명히 살아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9년 만에 열린 단군릉 개천절 행사

▲ 단군릉에서 9년 만에 남북.해외 개천절 행사가 열렸다. [사진 제공-배안]

이번 북 방문 중에 있은 가장 큰 이벤트는 단군릉에서 9년 만에 열린 남북.해외 개천절 행사였다.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하여 남쪽에서 해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통일뉴스>에서도 알려진 바와 같이 개천절 남북공동행사는 지난 2002년에 시작하여 2005년까지 이어져왔으나 그 후 계속 중단된 상태였다.

9년 만에 민족공동행사로서 열린 개천절에는 하나된 마음을 안은 우리 민족들이 모여들었다. 맑고 푸른 하늘이 마치도 우리 모두를 축복해주는 것만 같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슬기로운 민중들의 나라. 나는 이 민족전통과 정신을 이어 받은 백성인 것이다.

▲ 단군릉 모습. [사진 제공-배안]

여기서 우리의 조상들은 동방에서 찬연하게 빛을 뿌리는 아름다운 아침의 나라를, 후손만대에 이어질 풍요로운 나라를 일떠 세웠다. 단군릉 앞에 서서 눈을 감으니 내 가슴속에 버티고 있던 지치고 답답한 그 무엇인가가 떨쳐진 것만 같다.

우리 민족의 곧고 굳센 넋이 씨앗이 되어 내 가슴에 뿌려져 작은 새싹이 움터 나온 것과 같은 느낌이 다가온다. 단군의 정신. 우리를 하나로 하고 힘을 주는 여기서 다시 시작하자. 내 마음 속에 불씨가 다시 지펴 오른다.

33년 전엔 평양 시내를 샅샅이 걸어 다녔었다

▲ 평양의 건물들. [사진 제공-배안]

33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평양에 있는 동안 시간만 나면 시내를 샅샅이 뒤집는 듯 걸어 다녔었다.

평양호텔에서 평양역까지의 거의 대부분의 가게에 들어가 보고 구경 겸 뭘 사려고
했다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 33년 전 평양을 찾았을 때 필자. [사진 제공-배안]
이번엔 시간이 안돼서 이 동네를 걸어 다니지 못했다만 옛날에 가본 가게들이 많이 그리웠다. 책방, 식품점, 옷가게 등이 있었지만 많이 변한 것 같았다. 군고구마라고 쓰인 간판이 걸쳐져 있었던 가게에서는 얼음보숭이(아이스크림)도 팔았지만 여기서도 외국에서 온 손님들에겐 팔아서는 안 된다는 규칙이 있어서인지 “이제 다 팔려서 없습니다”는 말만 들었지 여기선 지갑 안의 돈이 날 떠날 줄 몰랐다. 김장을 구경했던 떡국집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결국 우리 일행이 뭘 제대로 살 수 있었던 곳은 평양 제2백화점 뿐이었다. 인삼크림, 입술연지(립 스틱) 등등 일본으로 가져갈 선물들을 여기서 구입하게 되었다.

그때 평양에 도착하자 마자 어떤 친척이 내 손에 워낙 많은 내화를 쥐어줬는데 그 돈 가지고 내가 살까 말까 망설였다. 결국 사지 못한 나전 경대가 있을까 지금도 많이 궁금하다. 하긴 이번엔 이 백화점이 아직도 운영하는지도 확인하지 못했다.

북의 영화와 고난

▲ 평양역 앞. 많은 차량이 보인다. [사진 제공-배안]

평양을 다니다 보면 옛날과 분명히 뭔가가 달라졌다. 수년 전 아주 깨끗했던 평양역전에 쓰레기가 흩어져 있는 것을 본 일본인이 경제발전이 가져다 준 폐물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했었지만 그런 장면도 없지 않았다. 내가 아는 어느 나라의 도시 치고도 이 정도로 정비되고 청결한 데는 드물지만 사실 그렇기도 하다.

하긴 내가 느낀 변화는 그런 것뿐만이 아니었다.
33년 전은 사회주의 보루가 아직도 단단히 닦아진 시대였고 설마 사회주의진영이 연달아 붕괴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조차 못했었다. 경제발전에 있어서나 국민 생활에 있어서나 남북을 비교한다면 북이 남을 앞선 시기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중국사람들이 이곳에 상품을 사기 위해 압록강과 두만강을 자주 왔다 갔다 건너기도 한 그런 시대였다.

“꽃파는 처녀”가 영화로, 가극으로 이름 떨쳐 유럽에서 일본에서 절찬을 받기도 하였다. 북은 일본, 미국과 같은 대국과의 대결을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도 어려움도 이겨가며 꿋꿋이 주권을 지키며 일떠선 나라로 세상사람들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그런 시대였다.

사람들은 입을 한일 자로 하여 하나같이 뭉쳐 이 나라를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어제나 오늘이나 이 나라 모든 정책들은 자주, 자립, 자위노선이란 이름 밑에 집행된다. 하지만 사실은 자위란 필수사항이 자주, 자립 밑에 깔려져 있는 것이다.

즉 정치든 경제든 문화, 예술이건 인민생활이건 모든 일은 대국들과의 대립이란 엄청난 에너지 소비가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사회주의 진영이 넘어지고 그에 따른 경제체제도 붕괴되어버린 그 시대에 북 체제도 틀림없이 무너질 것이라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은 온 세계를 배신하는 듯 1990년대의 나라의 존망을 가르는 지옥처럼 어려운 그 시대에 아픔과 어려움을 힘으로 바꾸어 오늘 또한 행복과 영광의 나라를 지향한다. 이것 또한 자위란 엄청난 소비가 뒷받침되어서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 평양이 꽃이 되어 웃는 것만 같았다

▲ 33년만에 다시 찾은 평양. 꽃이 되어 웃는 것만 같았다. [사진 제공-배안]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어 오늘은 거리를 다니면 날씬하고 세련된 젊은 여자들이 많아진 것이 눈에 띈다. 멋진 남자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 또한 내 눈을 끈다..

지금 북은 과학과 체육에 많은 힘을 넣을 것을 결심하고 그 길을 향해 질주한다.
평양 한가운데 웅장하게 세워진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 교직원 아파트며 이번 아시안 게임과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에서 북측 선수들이 남긴 성적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동네 어디서나 땅에서 솟아난 듯 자신감이 넘쳐난다.
평양이 꽃이 되어 웃는 것만 같았다.
아이도 어른도, 학생들도 직장인도 이 땅의 산이며 바다며 강이며 모든 것들이.
그런 모습은 일본에서 질식할 것만도 같았던 답답함을 끌고 온 나에게 안겨진 가장 큰 선물이었다.
고갈될 것만 같았던 내 마음에 생명수가 다시 가득 채워져 가는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할 바가 없는 것은 분단이란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아직도 이 비극의 주인공들이다. 통일이 현실적이지 않다며 우스개 소리라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그 정도로 통일에로의 길은 험하다. 하지만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이 코리아의 어느 반쪽에 속한 백성들로만 역사에 기록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통일의 탄압과 차별 속에 사는 재일동포들을 구할 길도 없다.
마음을 굳게 하나로 하여 우리의 지맥과 혈맥을 다시 이어야 한다.
세계만방에 빛을 부리지 않아도 남 보란 듯이 잘 살지는 못해도 오손도손 어울리며 우리 서로 하나가 되어 웃고 울며 사랑하며 미워하며 함께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런 평범한 나라의 한 사람으로 있고 싶다.

다시 일본으로 떠나다

▲ 평양비행장을 떠나면서. [사진 제공-배안]

모든 일정을 마치고 다시 일본으로 떠난다.
나오지 마시라고 말씀 드렸지만 끝내 나오신 숙부님과 가족들, 정다운 친구들, 호텔 종업원들의 전송을 받으며 공항으로 떠난다.

하늘도 땅도 나무도 한 포기 풀과 꽃들 그 외 모든 것들이, 모든 사람들이 한없이 그리워질 것 같다. 차창 밖의 풍경들이 가을이 다가오기를 알려주는 듯하다.

공항은 여전히 새 공항 건설을 다그치느라 기세가 드높다.
이 모습도 다음 이곳을 찾게 되었을 때 많이 그리워질 것이다.
이번엔 일본으로 내 마음 속에 지펴진 불씨와 새로 트인 싹을 안고 다시 바다를 건넌다.

평양이 다시 오라며 웃으며 바래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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