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안 / NGO활동가, 재일동포 2세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일동포 2세, 배안 NGO활동가가 9월 26일부터 10월 6일까지 북한에 다녀왔다. 배안 활동가로서는 33년 만에 다시 찾는 평양행이었다. 아울러 원산도 둘러보았다. 평양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리고 북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왔을까? 강산도 세 번 이상 바뀐 33년만의 방북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오늘 점심부터는 우리 집에서 먹어야 돼”

▲ 만경대에서 우리의 청으로 노래부르는 유치원 아이들. [사진 제공-배안]

평양에서 가고 싶은 곳, 그리운 사람들은 끝없이 많았다.
이번 방문의 목적의 하나는 오래 못 봤던 친척, 친지들을 만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면회, 방문을 예정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내가 잘 알거나 어릴 적 함께 지낸 사람들이라 오랫동안 서로 정을 나누며 살아왔다는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일본을 떠나면서 한 가지만 걱정되는 일이 있었다. 내가 가족방문하기로 했던 사람들 중 시숙부님은 유독 내가 한 번도 뵌 적이 없던 분이시다.

‘날 안받아 주시면 어쩔까?’
집을 떠나오면서 이 일이 걱정거리가 되어 궁금증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그래서 첫날째 숙부님께서 평양호텔에 나를 보러 나와 주신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날은 저녁식사를 다 같이 하고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다음날 집방문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 다음날 만경대고향집으로 가려고 버스칸에서 자리를 잡고 출발하기만을 기다리니 웬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보니 숙부님께서 서 계시지 않는가?

“오늘 우리 집으로 오게 되어 있는데 어디로 가는 거야?”
무뚝뚝하게 그렇지만 웃음을 입 끝에 띄우시며 장난기 있는 눈치로 날 쳐다보신다.

“어머! 오셨어요? 저 지금 만경대 갔다 와야 돼요” 하고 엉겁결에 나타난 숙부님 보고 불쑥 일어섰다만 내입에서 나온 말은 그저 그것밖에 안되었다.

안내원이 오늘 오후에 집 방문하기로 돼 있다고 전하자 “오늘 점심부터는 우리 집에서 먹어야 돼. 집에서 다 기다릴 테니” 하시면서 버스를 내려가신다. 뜨끈한 정이 가슴에 와 닿는다.

오후 호텔로 들어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숙부님이 호텔 문앞에 서계신다. 서둘러 준비하여 다시 로비로 나간다. 호텔에서 집까지 걸어서5분 정도라기에 걸어서 가기로 했다. 안내원은 손님을 어떻게 걸어서 모시겠냐며 난처해 하지만 내가 사람 사는 동네를 제대로 보고 그 냄새를 맡으려면 골목골목을 다녀봐야 한다 하니 숙부님도 “그럽시다” 하며 먼저 나서신다.

열심히 살려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공감이 간다

▲ 평양시 골목에 있는 체육추첨 판매소. [사진 제공-배안]

호텔 바로 앞 국립평양예술극장 정원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점심시간에 바깥으로 나와 장기 두는 사람들이며 그들을 둘러 싼 구경꾼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승부를 지켜본다. 그 한구석엔 야채며 과일이며 파는 사람들도 시트를 펼쳐 쭈그려 앉는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이기가 부끄럽다는 듯 사진 찍는 것도 썩 쉽지가 않다. 남쪽에서나 일본에서나 사람들이 제집 마당이나 밭에서 난 야채, 과일 등 가져다 지하철 입구나 길거리에서 판다고 하니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모습들이 꽤 마음에 든다. 사람들이 열심히 살려 하는 모습에 공감이 간다.

골목마다 아이들이 뛰어 놀고 아줌마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쑥덕공론이 벌어진다. 이것 또한 세계기준과 어긋나지 않다.

동네 안쪽으로 좀 더 깊숙이 들어가보니 체육추첨이란 간판을 내건 자그마한 상자 같은 집이 내 시선을 끈다. 알고 보니 이런 집들이 골목마다에 서있어 드문 것도 아니다. 여기가 우리가 사는 사회와 완전 다르다는 선입견이 내 눈을 가리고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숙부님 집안도 분단과 아픔의 이산가족

▲ 숙부님 가족들과 함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들이 나왔다. [사진 제공-배안]

숙부님 집은 멋진 아파트였다. 현관을 들어서니2층에 자리잡은 널찍한 공간 안쪽에서 숙모님이 뛰어 나오신다. 나를 반갑다며 껴안아주신다. 숙모님 또한 이때 처음 뵙게 된 것이다.

거실에서 어르신께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고 난 뒤에 일본에 계시는 어르신들, 가족들 안부를 전한다. 그 동안에 어느새 상이 차려졌다.

일본에서 흔하지 않은 녹두묵이며 요새는 구경하기조차 힘든 도라지, 내가 좋아하는 오리고기구이, 갈비구이며 귀한 산나물, 초밥, 김밥, 갈비국 등등 세어보긴 했지만 뭐가 얼마나 어떻게 나왔는지도 다 기억 못한다.

우리 숙부님은 경주 최씨 대표작인 듯 애교스럽지 않은 데다가 완고한 분이신 것 같았다. 두 딸을 두셨지만 그들에게 상냥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나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그 모습에서 흐뭇한 정이 나에게 전해진다.

벌써 몇 해 지나갔을 것이다. 남쪽에서 TV프로 ‘명가 최씨’가 방영되었다. 그 후로부턴 우리 남편으로 하여금 온 세상 경주 최씨들이 머리를 쭉 윗쪽으로 추켜들며 더더욱 가슴 펴고 걸어 다니게 됐다는 말씀을 드리니 기분이 좋아지신 모양이다.

최씨 앉은 자리에 풀도 안 난다는 ‘전설’이 오랫동안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해온 터라 더 그러셨던 모양이다. 완고하고 깍쟁이고 하는 데는 그나마 이유가 있다는 원대한 이야기가 여기서도 펼쳐지기 시작한다.

숙부님 역시 이별과 분단의 씁쓸함과 아픔 속에 살아온 분이시다. 해방 전 남쪽에서 어머니와 숙부님 그리고 여동생을 두고 일본으로 가신 아버지를 찾아 12살 때 홀로 현해탄을 건너셨다. 일본에선 우리 시댁에 사셨다는 얘기도 여러 번 들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시다 그 후 또 단신으로 북으로 건너오신 분이시었다.

숙부님 아버님 되시는 분이 재일본조선인운동에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종사하신 분이시어 숙부님은 결국 어머님을 일본에 모실 수 없었다. 해방 전후, 6.25전후로 한 남과 북, 일본의 사회정치적 혼란이 그대로 가족들에게도 닥친 셈이다. 분단과 대립에 의하여 찢겨지며 이산하게 된 또 하나의 가족들의 모습이 부각된다.

“난 널 군대 보내고 싶지 않아”

▲ 민족식당 앞길. [사진 제공-배안]

저녁에는 이 집 딸이요 사위요 손자요 하며 온 가족들이 모여든다. 이 집 손자는 김일성종합대학에 다니는 학생이다.

옛날 학생들은 거의 다 인민복에 모자 쓰고 책가방 들며 다녔었는데 원숄더의 멋진 작은 가방 하나 걸치며 나타난 그는 남쪽이나 일본의 대학생이랑 달리 보이지 않는다. 생물학을 전공하는 4학년생이라 한다. 키가 184센티미터라 후리후리하며 날씬한 몸매에 얼굴에는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다.

애인이 있냐, 취미가 뭐냐, 어떤 음악을 좋아하냐, 친구들이랑 어떤 데로 놀러 가냐 등등 내가 들이대는 아줌마공격을 피해보려 온갖 애를 써보려 한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 랄까, 귀엽다 랄까… 한참 얘기하다 내가 그에게 장차 어떤 일을 하고 싶느냐 물어본다.

“저 이제 군대 가야 할 나이 다 됐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날 처음 보는 손님이라 우물쭈물하며 머뭇거리며 얘기하던데 그가 갑자기 어른스러운 안색으로 답한다.

내 마음에 안개가 낀다.

‘징병’.
이는 남북의 그 어디에 태어나건 남자란 성을 지닌 이상 청년들 그 누구나가 다 가야 하는 길인 것이다. 그것도 적대와 대립이란 구조 밑에서 같은 민족끼리 총을 맞대고 마주보면서 서로 쏘아보며 서야 한단 말이다.

미래와 꿈을 막 펼쳐야 할 이 꽃나이 청춘에 총을 들고 최전선에 서야 한다는 말이다. 위험한 길이다. 목숨 걸고 나서야 할 길인 것이다.

“난 널 군대 보내고 싶지 않아.”
내가 울먹이며 그를 껴안는다.

“여기선 남자가 군대 갔다 와야 사람됩니다.”
누군가 속삭이듯 말한다.

꼭 군대를 다녀와야 한다는 진짜 이유를 누구나 다 안다. 남자라서 가야 한다는 말이 바른 답이 아니란 것 또한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인 것이다. 대립, 분단의 현실이 우리 민족 누구나가 껴안은 슬픈 현실이 되어 우리 모두들 뒤덮는다. 외적에게 향해져야 할 총부리가 우리 서로를 향해 있는 것이다.

해서 “난 널 안 보내고 싶어”란 내 말은 그냥 너무도 공허하게 울리기만 한다. 남북에 사는 우리 민족들이 껴안은 이 아픔을 가시려는 우리 모두의 소원은 누구 한 사람, 어느 한 가족의 힘을 가지고선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아는 일이기 때문에. 분단과 대결. 이 현실이 닻이 되어 우리 모두의 가슴속 깊이에 가라앉는다.

좋은 시간은 어찌 이다지도 빨리 지나가 버릴까?

▲ 숙부님이 경영하는 민족식당. 남북교류가 한창이었던 시기엔 해외뿐만 아니라 남쪽 손님들도 많았던 가게이다. [사진 제공-배안]

▲ 민족식당 연회장. [사진 제공-배안]

2일째 저녁은 숙부님께서 경영하는 식당에 가족들이 다 모여서 식사하기로 했다. 남북교류가 한창이었던 그 시기엔 해외뿐만 아니라 남쪽 손님들도 많았던 가게인 민족식당이다.

이모님이라 불리는 숙모님 역시 여기서 일하신다. 불고기며 녹두전이며, 나물이며 생선이며 차려놓고 노래 자랑을 시작한다. 가게 이쁜 아기씨도 노래경연에 참여하면서 나와 숙부님 가족들과의 상봉의 시간은 끝나가려 한다. 울며 웃으며 또한 시간은 지나간다.

좋은 시간은 어찌 이다지도 빨리 지나가 버릴까? 처음 찾은 숙부님집. 처음 같지 않게 너무도 편하게 즐겁게 지냈다. 일본을 떠나오면서 몹시 궁금하고 걱정했던 일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자 “평양호텔에서 처음 봤을 때 밉게 생겼으면 우리 집에 데려오지 않겠다 생각했다”시며 또 장난치는 듯 날 쳐다보시며 웃으신다.

내 마음속에서 궁금과 아쉬움이 자리를 바꾸고 가슴속에 혈육의 정이 뿌듯하게 다가와 내려 앉았다.

아쉬운 마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 다음 날부터 숙부님은 내가 평양에 있는 날엔 틀림없이 딸을 데리고, 손자나 사위를 데리고 또는 숙모님과 함께 호텔로 찾아오셨다. 구경하기 어려운 야채대신 과일이라도 들라시며 대추요 감이요 포도요 과자요 하며 들고 오신 것이다.

▲ 민족식당 종업원이 노래자랑을 뽐내고 있다. [사진 제공-배안]

저 멀리 통일의 미래가 두 팔 펴고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 종할아버지 묘 앞에서숙부님, 숙모님과 함께. 가운데가 필자. [사진 제공-배안]

원산으로 떠나는 날 아침 숙부님, 숙모님을 모시고 우리 종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애국열사릉을 찾았다.

한평생을 조국통일과 재일동포들을 위한 길에 바치신 분이셨다. 아들이신 우리 숙부님께서 귀국하신 몇 년 후 역시 북으로 귀국하셨다. 가족들에게는 엄하신 어른이셨다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힌 듯 들어 왔다.

유서 깊은,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인 이곳 주변에선 추수가 시작된지라 벼가을이 한창이다.

묘 앞에 서서 절을 올린 다음 “할아버지, 제가 너무 늦게 찾아와 뵙습니다. 용서하세요. 우리 아직도 좋은 시대를 만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저 혼자 이렇게 찾아 왔답니다. 제가 앞으로 일 더 잘 할겁니다. 그래서 좋은 세상도 보고 우리나라 통일하게 할겁니다. 지켜봐 주세요”하고 말씀 드린다.

숙모님께서 눈가를 훔치시며 “할아버지가 웃으시네”하신다. 햇볕이 눈부신지라 내 눈앞도 흐려진다.

다음에는 할아버지를 뵈러 우리 일가들이 다 같이 여기에 오고 싶어졌다. 남북, 해외에서 이곳에 다 모여 분단과 대립의 역사가 과거의 일이었다며 웃으며 얘기하는 그런 날이 왔으면 하고 생각했다.

허나 우리에겐 아직도 서로가 행복도 기쁨도 아쉬움도 슬픔도 함께 하며 나누며 살 자유가 차례지지 않았다.

남에서나 북에서나 해외에서나 누구나 이 아픔을 잊으며 살려 한다. 희망을 가지라 하기엔 너무도 아득하고 먼 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러나 이 땅도 이 혈맥도 다 우리의 것이다. 우리 서로를 갈라놓고 원수지게 하는 것은 외세다. 이를 악물고 몸이 찢기는 것과 같은 이별의 아픔, 가슴 터질 것만 같은 이 이산의 서러움의 원인은 우리나라를 짓밟고 지배하려 우글거리는 외세들의 흉한 욕망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억센 외세들을 강철 같은 힘으로 떨쳐버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미래들이 서로 맞다 들며 총을 겨누고 서지 않아도 좋은 조국은 통일만이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런 날을 그 누가 아니라 내가 가져와야 한다.
언덕 밑으로 펼쳐진 전원이 한눈에 안겨온다.
여기에 잠든 수 많은 통일열사들이 나를 지켜본다.
저 멀리에 통일의 미래가 두 팔 펴고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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