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흔히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하여 더 많이 안다는 것 뜻하죠. 즉 아는 만큼 우리의 사랑도 커지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에 내가 딛고 사는 이 땅의 역사를 활자가 아닌 내 발로 직접 느껴보고자 나의 한양도성기행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횟수를 거치면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나 스스로 정리해보고, 또 그것을 함께 공유해 보고자 글로 남기기로 한 것이며, 또 내가 역사전문가가 아니기에 혹 잘못된 정보가 있을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지적과 비판은 기꺼이 환영합니다. /필자 주

<필자 프로필>
후퍼소프트(www.whoopersoft.com) 대표이사
<하나를 위하여 : 민통선-DMZ 통일나들이>, <북한영화, 그리고 거짓말> 저자, <21세기 민족주의>(공저)

(1회 연재에서 이어집니다.)

▲ 돈의문~사직터널 구간 역사기행 장소. [자료 - 유영호] 

<경교장(京橋莊)>, 친일파 최창학, 이광수의 신분세탁 공간

자기 이름조차 불리지 못하며 외세에 의해 헐려져 없어진 슬픈 돈의문의 옛자리를 지나 드디어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현재 ‘정동 사거리’로 불리는 곳. 이제부터 성곽의 흔적을 찾아 본격적인 도성순례를 하기로 해보자. 정동사거리에서 좌측으로 돌아 인왕산 방향의 성곽을 따라 걸을 계획이다. 그런데 왼쪽으로 돌자 마자 강북삼성병원이 보이고, 그곳 경비실에서 한양도성투어를 위한 지도를 나누어준다. 그것을 받아 들고 바로 떠나려 하였지만 나를 붙잡는 곳이 있다. 그것은 바로 백범 김구가 이끄는 상해임시정부가 해방을 맞아 고국에 돌아와 임시정부 청사 및 백범의 숙소로 사용한 <경교장(京橋莊)>이다.

▲ 강북삼성병원 안에 위치한 <경교장>. 백범 김구가 해방 뒤 머물렀으며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곳이다. [사진-유영호] 

친일광산업 대부 최창학

이곳 경교장은 1938년 광산업으로 거부가 된 친일파 최창학이 자신의 별장으로 지은 건물이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되자 친일파에 대한 응징의 조짐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 때 최창학은 그 방패막으로 자신의 별장을 백범 김구에게 빌려준 것이다. 백범은 이를 임시정부 청사 및 자신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이후 이곳에서 1948년 12월 반탁운동이 시작되었고, 또 1948년에는 이승만 단독정부가 미국의 힘을 얻고 강력하게 추진되자 이곳을 떠나 북으로 남북협상을 떠난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 후 평양에서 돌아 온 그가 이곳에서 1949년 6월 29일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된 곳도 바로 이곳이다. 그야 말로 우리 현대사의 격동을 충분히 느끼며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 경교장의 2층 김구집무실에는 김구가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되었을 때 입고 있던 옷 등을 전시해 두어 암살당시의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해 두었다. [사진-유영호]

그런데 나는 궁금한 점이 있다. ‘왜 하필 김구는 친일파의 별장을 자신의 숙소 및 임시정부 청사로 사용했을까?’하는 점이다. 최창학은 최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은 물론 임시정부가 스스로 작성한 친일파명단에도 들어 있던 사람일 만큼 철저한 친일파이다. 아무리 급했다고 한들 친일파의 재산을 합법적 몰수가 아닌 무상임대형식으로 빌려 쓴 것은 잘못이다.

멀리 이국 땅에서 모진 고난 속에서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버텨온 그들이 아니었던가. 좀 비좁고 불편한들 어떠랴. 해방된 조국에서 인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건국사업을 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게 하는 장소이다.

어쨌든 결국 백범 김구가 암살되자 최창학은 고액의 임대료를 요구하는 식으로 결국 경교장을 다시 회수해 갔다. 그 건물은 친일파 최창학의 안전을 위한 담보물이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가 숨짐으로써 자신에 대한 안전담보 역할이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최창학의 행동을 볼 때 설사 김구가 죽지 않고, 반민특위가 해체되지 않았다고 하여도 백범은 그에 대한 처벌에서 과연 공평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곳이다.

친일문학가 이광수

또 이곳 <경교장>에서 일어 난 일 가운데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다. 일제시대 최고의 친일파가운데 한 명이 김구를 찾아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바로 조선의 천재로 불리던 소설가 이광수이다. 그는 김구가 독립운동과정에서 정리해둔 일지(日誌)를 자신이 편집하여 책으로 내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렇게 이광수에게 넘어간 김구의 초고가 1947년 책으로 완성되었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백범일지(白凡逸志)》이다.

▲ 친일파 이광수에의해 편집되어 1947년 12월 출간된 국사원 《백범일지》의 표지 [사진출처-가자북]

이 책의 마지막 부분 ‘나의 소원’은 한 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이다. ‘나의 소원은 A4용지 4~5장 분량의 짧은 글이지만 그야 말로 주옥 같은 글로 우리들에게 민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며 얼마나 감동시켰던 글인가? 이 책은 ‘저자의 말’, ‘상권(중국편)’, ‘하권(조선편)’, ‘나의 소원’ 등 총 4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저자의 말’과 ‘나의 소원’이 이광수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져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에 대하여 김구의 아들 김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춘원(주:이광수)은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했답니다. 아버님은 그의 행실 때문에 망설였는데, 누군가가 글 솜씨도 있는 사람이고, 속죄하는 기분으로 맡겠다니 시켜보라고 했대요. 그가 윤문(潤文)을 한 것은 사실이나, 아버님이 그걸 알고 맡기셨는지 의문입니다.”

나는 김구가 자기 자서전의 제목을 왜 일기(日記)나 일지(日誌)가 아닌 일지(逸志)로 쓴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뛰어난 물건을 우리가 일품(逸品)이라고 하듯이 일지(逸志)의 사전적 의미는 ‘뛰어난 뜻’ 즉, ‘훌륭하고 높은 지조’를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백범일지(白凡逸志)》는 그 한자 뜻 그래도 해석하면 백범 자신의 훌륭하고 높은 지조를 쓴 기록물이란 뜻이 된다. 그야말로 자기 얼굴에 스스로 금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왜 김구는 이렇게 이광수에 의해 윤색된 자신의 글을 그대로 출판하게 하였을까? 우리를 무척 곤혹스럽게 하는 부분이다.

이런 사태에 대하여 이미 1957년 당시 심산 김창숙은 "왜놈 앞잡이 이광수가 백범 집에 가서 백범이 적어둔 일기를 가지고 자기 집으로 가서, 백범일기를 없애버렸다. 광수가 광복사료를 없애버린 것”이며. "이광수가 나라 겨레를 어둡게 만들려고 그런 짓을 했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여태까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곳 경교장에 서서 백범 김구에 대한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참고로 이곳 경교장의 본래 이름은 ‘죽첨장(竹添莊)’이었다. 최창학이 1938년 지은 건물로 일제시대 지금의 종로구 평동 일대의 지명을 일본식으로 죽첨정(竹添町)이라 명명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백범이 사용하면서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을 근처 다리이름 경교(京橋)를 따서 ‘경교장’이라고 바꿔 부른 것이다. 경교는 현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쪽에 있던 다리로 당시 경기도(京畿道)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최창학에게 환원된 뒤 이곳은 한국전쟁 중에는 미군 의무부대의 주둔지였고, 1956년부터 베트남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1968년 삼성이 인수한 뒤 강북삼성병원 부지로 편입돼 병원 시설로 쓰였다. 이후 여러 곡절을 겪은 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돼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내부를 원형대로 복원해 놓았으며, 2층 집무실에는 당시 이곳을 침입한 안두희의 발자국과 창문을 뚫고 나간 총탄자국을 재현해 놓았다. 또 당시 백범이 피살될 때 입고 있었던 옷에 그의 핏자국이 남은 채 전시되어 있어 당시 처참했던 순간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동아일보의 왜곡보도와 백범 김구의 반탁운동

우리가 백범 김구를 생각할 때 흔히 머리에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독립운동, 반탁운동, 남북협상 그리고 암살’ 이 네 가지 일 것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나는 그의 무조건적인 반탁운동에 대하여 ‘좀 더 신중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미국은 워싱턴회담(1943.3)에서 만주와 대만은 중국에 반환되어야 하고, 베트남과 한반도는 신탁통치 아래 놓여야 하며, 그 기간은 40~50년을 주장하였다. 또 같은 해 카이로회담(1943.11)에서는 일본이 탈취한 섬은 모두 반환해야 하며, 만주, 대만, 팽호군도를 중국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결의하였지만, “한반도는 ‘적당한 시기’에 해방되고 독립될 것”이라며 즉시 독립을 유보하고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는 의도를 재차 확인하였다.

그 후 미국은 여러 차례 한반도 신탁통치를 언급했고, 미영소 3국정상회담(1945.2)에서는 미국이 2~30년 정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소련은 가능한 빠른 시일 내 독립을 주장했지만 결국 미소양국은 ‘5년 이내’로 타협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은 그 뒤 포츠담선언에서도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하면서 ‘적당한 시기’에, 즉 일정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하였다.

그런데 포츠담회담까지도 과도정부의 성격, 군사적 점령이나 한반도의 완전독립 시기 등에 관하여 명백히 합의하지 못한 채 갑작스런 일본의 항복으로 분단의 씨앗이 잉태된 것이다.

물론 이런 상태에서 일본군이 철수하고 미소양군이 분할점령하였지만 이때까지는 군사적 편의에 의한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적어도 1945년까지는 분단이 고착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스크바3상회담와 이에 대한 12월 27일자 동아일보의 왜곡보도, 그리고 이에 휩쓸려 버린 신탁통치분쟁은 우리를 남과 북, 좌와 우로 갈라 놓는 씨앗이 되고 만 것이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는 아직 모스크바3상회담의 정식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다음과 같은 왜곡된 사실을 호외로 뿌렸다. 동아일보의 창의력은 정말 대단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하지만 이러한 동아일보의 기사는 명백한 왜곡보도이다. 당시 처음부터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기획하고 주도했던 미국으로서는 우리가 막상 해방이 되고 나니 이 땅에서 민족주의가 분출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또 반공주의에 젖은 미국 신문 '성조기'나 해방공간에서 미군정의 보호를 받는 정당인 한민당의 사실상 기관지 역할을 하던 동아일보는 이러한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국민들에게 반소. 반공 감정을 불러일으키고자 했고, 또 이를 통하여 당시 친일청산의 들끓는 대중적 요구를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던 것이다.

▲ 모스크바3상회담에 대한 왜곡 보도한1945년 12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관련기사 

이 보도가 나간 후 한반도는 순식간에 들끓기 시작하였으며, 동아일보의 교묘한 왜곡보도를 근거로 `모스크바 협정=식민지적 신탁통치=소련의 주장=반민족적 행위`라는 등식이 성립되면서 좌우 탁치논쟁으로 한반도는 실질적인 분단상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회담 발표내용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신탁통치 기간 동안 통치의 주체를 임시정부로 둘 것이냐, 미영중소 4대국의 협의체로 둘 것이냐 역시 소련의 논리가 승리해 우리가 구성하게 될 임시정부에 주어졌다. 즉, 모스크바3상회담의 본질은 신탁통치의 여부가 아닌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회담내용이 알려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김규식, 안재홍, 송진우 등 우익인사들도 반탁이 능사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자 이들 역시 테러의 표적이 되고 만다.

결국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과가 좀더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전달되었다면 오히려 분단을 막고 순조로운 건국과정을 행할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일 수도 있다는 점이 널리 알려지며 토론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후 한반도의 역사는 판이하게 다르게 전개 될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로 동아일보는 이러한 왜곡보도에 대하여 아직도 사과의 뜻 조차 밝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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