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4월 4.19국립묘지에서 6.15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사진 - 류경완]

“내가 이 4.19탑 근처에 살게 된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루를 이곳에서 시작하면서 나를 다시 가다듬고 긴장을 다지는 거야. 사회를 위해 목숨 바친 젊은이들, 그들이 내 삶을 똑바로 서게 해요.”

1970년 구멍가게를 운영하던 첫 부인이 과로로 병을 얻자 선생은 치료를 위해 택시운전에 나선다. 4년 전 청력이 약해져 그만 둘 때까지, 이틀 운전하고 하루 쉬는 개인택시로 40년 꼬박 그렇게 일했다. 부인은 71년 폐결핵으로 사망한다.민족의 화합과 통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라디오를 틀어놓고 승객의 직업과 성별, 나이를 감안하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사회 현안에 대한 반응도 다양했지만 선생이 전달하고 싶은 핵심은 ‘미국에 지배받는 한국의 상황’이었다.

“근본원인이 뭔가, 이거죠. 사회양극화, FTA, 농민문제, 스크린쿼터 등에서 우리가 미국에게 어떻게 지배받고 있는가. 사회현상에 가려져 있는 밑바닥의 본질을 함께 얘기하고 싶었던 거예요.”“하루 30여 명의 손님이 내게는 모두 선생이었지요. 숱한 유형의 사람들과 마주치다 보니 대화에도 요령이 생기더군요.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 맞게 주변의 일상에서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체육회 모임과 등산, 여행 등으로 함께 어울리던 동료 기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있지만, 지금도 구순의 선생은 수유리 집 뒤 삼각산 대동문과 칼바위 능선을 홀로 오른다. 규칙적으로 아령을 들고 한겨울 냉수마찰도 한다. 6.15산악회에서는 모범상을 받았고, 최고령 기록을 매달 바꿔치며 앞장서 정상에 오른다.

“부모님 덕도 있겠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건강의 비결은 꾸준한 노력이죠. 등산을 하면서도 쉼 없이 옛 생각을 떠올리고 자연을 관찰하면서 노래도 흥얼거립니다. 즐겁게 머리를 쓰고 늘 ‘오늘 최선을 다했는가?’ 자문하며 긍정적으로 살려 합니다. 615산악회든 어디든 힘 자라는 데까지 일선에서 갈 겁니다.”

▲ 택시운전 40년 경력의 베테랑. 단순한 밥벌이가 아닌 일상의 통일운동, 청력 약화로 손님과의 대화가 힘들어져 몇 년 전 그만두었다. 서울의 골목 골목이 눈에 훤하다.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작은 것 하나’]

연탄배달에도 형사가 따라붙던 신산한 삶. 돈은 평생 선생에게서 멀리 있었지만 99년 2월 현대의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자 곧바로 ‘거금을 들여’ 금강산에 다녀왔다. 세관 통관 때 인민군 장교의 손목을 잡고 눈물을 쏟았다 한다. 50년 만의 “반갑습니다!”였다.

금강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안내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좀 더 위로 올라가 부인이 챙겨준 술, 대추 등을 차려놓고 고향을 향해 목 놓아 부모님을 불렀다. 이튿날 뱃전에서 장전항을 바라보니 인민군들이 행진하는 모습이 보였다.“나는 북에 살 때 외아들이었습니다. 여동생 둘이 있었고 의붓형이 하나 있었지요. 나는 25년 을축생입니다. 24년 갑자생까지는 다 일제 징병으로 끌려갔어요. 한 마을 일가 형 중에 갑자생이 있었는데 해방 15일 전에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 부모가 저녁이면 마을 어귀에 나가 아들을 기다리는 거예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내가 형무소에 갇혔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게 바로 그 광경이었어요.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나를 기다리시겠거니... 그렇게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산 게 50년이 훌쩍 넘었네요.”

문익환 목사의 사모님 박용길 장로와 우연히 동행하게 되었는데, 금강산 교예단과 함께 기념 촬영한 사진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 평양 순안공항에서. [사진제공 - 유기진]

▲ 금강산 관광. [사진제공 - 유기진]

▲ 2003년 이산가족 상봉에서 평양의 여동생과 감격적인 재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 - 유기진]

2003년 이산가족 상봉에서 선생은 북의 여동생을 만났다. 고향에는 의붓형만 살고 있고 두 여동생은 평양에 살고 있다 했다. 여동생은 오빠가 인민군 나간 뒤 간호병으로 참전했다가 평양에 눌러 살게 되었단다.

50년을 넘긴 세월, 오빠의 얼굴을 못 알아볼까 싶어 동생은 단 한 장 남은 중학교 시절 사진을 가져와 내밀었다.

“오빠세요? 이 사진 속에 있는 오빠 맞으세요?”

모친은 51년 1월 15일 장진호 전투에서 패하고 퇴각하는 미군의 폭격으로 돌아가셨다 했다. 인민군 포로 출신 가족의 상봉이라 기자들이 몰렸지만 1초의 해후도 아까운 선생은 모든 취재를 뿌리쳐 버렸다.

<계속>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