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31일 ‘6.15산악회장배 체육대회’에서, 통일의 그 날까지 개회사를 하겠다고 호언하는 선생. [사진 - 류경완]
해방 후 어린 나이에 선생은 면당위원장의 추천으로 입당하고 흥남비료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당시 흥남공장은 비료, 화학, 카바이트, 화약공장과 제련소가 있는 이북의 공업 중심지였다. 공장을 폭파하고 도망가려는 일본인들의 시도를 알게 된 주영하, 김태식 등이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선생의 6촌형 등과 함께 급히 쫓아와 공장을 정상화시킨다.

일본인 기술자들을 설득해 밤새워 기술을 전수받고, 청년 노동자들로 자위대를 구성해 공장을 지켰다. 1주일이 걸려 공장이 탈 없이 돌아가게 되자 일본인들이 다시 공장을 파괴하려 했다. 화약공장 같은 데는 청년 자위대가 3일 밤 동안 습격해 오는 일본인들을 막는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동시에 민청에서 청년들을 규합하고 교양교육을 진행하던 47년 8월 면당위원장이 불렀다.
“인민군 창설부대에 갈 수 있겠는가?”
“그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과업이든 당이 부과하면 나는 극복할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습니다.”“그러니까 불렀다. 군당으로 올라가 봐라.”

부친의 추석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모친은 먼저 고향으로 내려가고, 선생은 추석 전날인 14일 고향으로 가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13일 군당으로 가 입대하면서 영영 마지막이 되었다. 모친은 전쟁 발발 후인 51년 1월 15일 장진호 전투에서 참패하고 퇴각하던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만포에서 훈련받던 어느 날 인절미떡 한 말이 실려왔다. 6촌형 중진이 군관학교 졸업 후 휴가차 고향에 갔다가 모친이 내놓은 편지를 보고 같은 부대라 부랴부랴 찾아온 것이다. 이 편에 보내준 떡이었는데, 모친이 손수 만든 마지막 음식 맛이 지금도 오매불망 잊혀지지 않는다.

만포(당시는 진남포)에는 각 군에서 두 명씩 모아 인민군 부대가 창설되었다. 처음엔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군복도 없이 보름 정도를 지냈다. 일본이 남긴 만포 유리공장의 가구를 뜯어 직접 숙소와 침대를 만들고, 연병장도 손으로 닦았다. 그러다 보니 군복도 들어오고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군 생활이 시작되었다.

선생은 4연대 45mm 포중대에서 1년 간 훈련을 받는다. 간부들은 주로 중국에서 싸우다 들어온 팔로군과 항일투쟁 경력자들이고 군관학교 1기생들이 소대장 중대장으로 복무했다.

결혼 사흘 만에 입대한 신병을 ‘조국의 부강건설에 가정이 중요하다’며 집으로 돌려보낸 문화부 연대장의 인간적인 면모에 감동한 적도 있었다. 훈련을 마친 선생은 하사로 부분대장에 임명된다.

▲ 민가협양심수후원회 974차 목요집회에서, 4월 10일 탑골공원. [사진 - 류경완]
그동안 38선의 정세는 격동한다. 초기에는 인민들이 오가는 것을 막고 감시하면서도 장사꾼들의 내왕은 묵인해 주었지만, 백골부대 김석원이 38선 이북을 침범해 마을을 소각하면서 48년 초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국군들이 105mm 포로 전쟁처럼 들이치니 38경비대에서도 포가 필요했다. 인민군이 박격포와 45mm포 중대를 소환한 48년 7월, 선생도 내무성에 소환되어 38경비대로 나온다.

내무성에서 교재도 없이 백지 노트에 필기하며 교육 받기를 일주일, 그 노트를 심사해 포학교육 능력을 인정해 38선으로 보냈다. 사리원 도착 후 해주포병직속중대로 45mm 포병중대가 창설되고 선생은 1분대장으로 복무하게 된다. 포중대 5명의 분대장이 새로 충원한 포대원들을 교육하고, 정치사상 교육은 문화부 중대장이 맡았다.

38선에서의 훈련은 곧 싸움이었고 싸움이 학습이었다. 김석원의 백골부대와 밀고 당기며 1년 6개월 간 까치산, 운파산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크고 작은 전투는 6.25까지 지속되었다. ‘나의 고지 조국의 고지, 조국의 고지 나의 고지’, 38선 부근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죽어가던 한 병사의 마지막 외침은 선생에게 일생의 전투지침으로 각인되어 있다.

인민군 부대에서 ‘아바이’로 통하던 최현 장군에 대한 선생의 추억은 각별하다. 백전백승의 신화로 아무리 전세가 불리해도 “우리 아바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면 사기가 무섭게 올랐다. 한밤중에 총소리가 나면 혼자서라도 밖에 나가 꼭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잠을 잤다.

평상시 부하들에 대한 사랑도 남달랐다 한다. 부대를 돌 때는 늘 식당으로 먼저 갔다. 주방장을 불러놓고 “소뼈는 얼마동안 고았는가?” 일일이 지적했다. 비가 와서 천막을 지어도 먼저 들어가 쉬는 일이 없었다. 천막이 다 완성된 후 병사들이 다 들어간 후에야 안으로 들어갔다.

한번은 전세가 불리한 전투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으나 상급간부가 오판으로 싸움을 계속 진행하다가 병사 두 명이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 최현은 격노하여 그 간부에게 “우리 아들 내놓아라”하며 총을 꺼내 들 정도였다. 그런 장군 밑에서 인민군들은 언제나 솔선수범했고 무기 하나 포 하나 대충 닦는 일이 없었다. 인민에게 보답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0년 3월 선생은 다시 소환되어 금천에서 3개월 간 특수교육을 받고 38경비대 직속 포병중대 소대장에 임명된다. 한 개 포중대가 대대로 확장되면서 내무성 견장을 달고 백골부대에 맞서 개성까지 밀고 나왔다.

<계속>

(수정, 17일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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